#. 시작하며
보통 때라면, 이렇게 길고 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을.
나는 김훈 선생이 '밥' 하나로 빈 종이에 글 떼우는 솜씨를 보고.
나도 지리멸렬. 글 한번 흩뿌려 봐야겠다 하고 마음먹고 쓰는 글이 되시겠다.
#.
사람에게 기질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처음 '건망 기질'을 깨달은것은, 스물 두살.
이모가 내게 '너는 학교를 한번에 가는적이 없다'고 말할 때였다.
* 기질(Temperament,氣質) : 자극에 대한 민감성, 특정 유형의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개인 성격 소질
#.
내 어린시절. 무릇. 그 시절 어린이라면.
신발가방은 깜빡하고 학교에 가는것이었고.
준비물은 신발장 옆에 고스란히 두고 가는 것이었다.
저녁에 급한 일이 생긴 엄마가, 아침 일찍 목에 걸어준 집 열쇠는
으레 운동장에서 망아지처럼 뛰어놀다 잃어버리기 마련이고,
집 앞에 쪼그려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다.
나는 나이가 서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차키를 방에 두고 급하게 현관을 나선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해, 베란다 밑에 기다리고 있으니 차키 좀 던져달라고.
먹던 한약도 놓고 나왔으니 약 봉투좀 던져달라고 다급하게 외쳐댄다.
나는 20년 전 10살 무렵 등굣길. 그때도 매일같이 베란다 밑에서 엄마를 불러댔다.
갱지 가정통신문의 밑둥 점선을 꾹꾹 눌러 접어 잘라내고,
소풍비, 수련회비 같은 한 줌 돈들을 곁들여 놓은채 깜빡하고 집을 나서면.
엄마는 비닐봉투에 한데 모아, 뒷 베란다에 그대로 던져줬고.
나는 냅다 달려가 듬성 듬성 자란 나뭇 가지들을 헤치고 봉투를 집어 들곤.
뒤도 안돌아보고 학교에 달려 갔었다.
등굣길의 베란다를 향한 나의 외침은. 그저그런 보통의 일과중 하나였다.
엄마 역시 으레 그 시간이면, 베란다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었으리라.
#.
정신분석 강의에서 프로이트가. 사람의 실수는 무의식에서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건을 잃어 버리는 것은 그 물건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거나,
사이가 나빠진 관계인 사람에게서 받은 물건이라던가,
좀 더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무의식의 의도 덕분에 생긴 결과라고 말했다.
왜그런지 몰라도. 나는 물건을 지겹게도 잃어버려댔다. 혹은 대고있다. 대는 중이다. 댈 것이다.
#. 책가방
나는 참 맨정신에 등에 맨 책가방을 잘도 잃어버렸다. 아마 18살쯤일까.
학원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남아 학교 앞 PC방에 간 적이 있었다.
한때 언니 가방이었던 루카스 데님 백팩을 벗어 다리밑 본체 옆에 두고.
아마 하염없이 싸이월드를 했으리라. 시간이 다되어 계산을 하고 학원 셔틀을 타고.
학원에 도착해 책상에 앉았는데. 아뿔사, 등이 너무 허전하다.
책가방을 통째로 피씨방에 두고 맨손으로 학원을 덜렁덜렁 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때 내 인생에 책가방을 잃어버리는 것이 그 때가 마지막일 줄 알았다.
하지만, 몇년 지나지 않아 시작된 서울 생활에서도. 그정도 분실은 아주 흔한 사건일 뿐이었다.
22살 언저리 1호선에서, 녹색 백팩에 핸드폰 엠피쓰리 모두 담아 선반에 올려두고.
동대문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내렸던 적이 있었다. 대체 가방이 어디까지 떠나 가는건지 몰라,
역무원 아저씨께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쩌냐 여쭸고. 당시 막 시작됐던 핸드폰 위치추적 기능은.
내 핸드폰이 구로를 지나고 있다 알려줬고. 결국 가방은 병점 어드메쯤.
물품 보관소에서, 무사히 되찾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도 여러번 역무원 아저씨를 찾는 일이 있었으나, 더이상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보통 내가 탄 열차 호수와 플랫폼 번호,그리고 하차 시간을 말씀드리면,
역무원 아저씨들끼리의 연락을 통해 열차가 정차했을 때,순간적으로.
다음역이나, 혹은 다다음역 역무원 아저씨들이 물건을 꺼내서 보관해준다. 더 멀리 떠나가지 않도록.
뭐 이런 팁은 나 말고 또 누구한테 필요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꿀팁들을 알고 난 이후에 나는 지하철 분실을 마주해도 더이상 당황하지 않고,
역무원 아저씨께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여쭤볼 수 있었다. 참 뿌듯하다.
#. 핸드폰
64화음 컬러 최신폰을 갖게 되었을 때의 나는.
역시. 내가 핸드폰을 밥먹듯 잃어버리고 다니게 될 줄 몰랐었다.
밥 먹고 깜빡, 화장실에 두고 깜빡, 버스에 깜빡, 작정하고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다녔다.
정말 신기한 건, 매번 다시 되찾았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건 정도가 좀 심했다.
나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이제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내 말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스물 두 살로 막 넘어가던 그 해. 그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던 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며 그 친구는 내게. 습관처럼.
"핸드폰은?" 이라 물었고. 나는 습관처럼 "챙겼어" 라고 말하곤 주머니 속 핸드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곧 그 친구는 무표정하게. "아니, 요금제. 해지할까?" 라고 물었고.
나는 금세 민망해져 "응." 이라고 대답하고 황급히 도망쳤던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이런 젠장.
#. 지갑
애초에 나란 놈은 년은 지갑이란 것과 어울리지가 않는 사람이다.
지갑에 늘상 '후사 하겠습니다. 제발 돌려주세요' 편지를 넣어두고 다니는 내게.
지갑분실은, 매년 엄마가 곰국을 끓여주는 횟수와 엇 비슷하다.
곰국이 만병통치약인 엄마를 둔 덕분에. 나는 지갑을 꽤 자주 잃어버렸는데.
그래도 어렸을 적에는 신기하게 잃어버린 지갑을 잘 찾았었다.
지하철에서 카드 지갑을 주운 누군가는 서울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직접 찾아가라 하여 평일 대낮에 서울역에도 들러보았고. 연락처 없이 덩그런히 꽂혀있는.
대학교 학생증을 보고, 학교에 전화를 걸어, 부러 부모님 연락처를 알아내,
아빠의 연락을 거쳐 내 손으로 돌아온 지갑도 있었다. 다만, 27살 쯤이던가. 술 먹고.
현금이 잔뜩 들어있는 지갑을 택시에 두고 내린 이후로 지갑의 회귀본능은 잠시 주춤했고.
친구가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줬던. 삼팔 광땡. 19살 때부터 거의 8년동안 지갑에 지니고 다녔던,
그 삼팔광땡 화투장과 편지를 잃어버린 슬픔에. 나는 더이상 지갑을 들지 아니하기로 마음먹었다.
필요한 것만. 최대한 간소화된 카드지갑을 사용하기로 그 노선을 바꾼 이후에.
최근까지도 지갑의 잃어버림에 대한 기록은 계속되고 있으니.
지난 여름, 출장가는 길 셀프 주유소에서 지갑을 차 지붕 위에 올려둔 채 주유를 하고.
신여성이 된 느낌에 우쭐해서, 쿨하게 차에 올라타 그 길로 한시간 정도 운전을 했는데.
나는 차에서 내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지붕 먼지 위로 무언가 미끄러져 떨어진 자국을 발견했고.
아차. 싶었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지갑은 도로에서 이름모를 바퀴들에 몇 번 갈린 흔적 말고는,
말짱한 상태로 집에서 20분쯤 떨어진 경찰서에 보관되어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주워다주신 분 완전 고맙 땡큐 베리는 감사를 한껏 담아서 보내드립니다.
#. 기타
현수막 - 동아리 졸업 선배들이 공연장을 대관해 열었던 졸업생 밴드 첫 공연.
너무나도 축하하고 싶은 마음에 수일 전부터 야심차게 현수막을 제작했었다.
모두를 웃겨주겠다는 욕심으로 이런 저런 문구도 쓰고. 사진도 넣고.
일정이 급박한 관계로 성수동 현수막 업체들을 직접 찾아가 방문 수령을 하고.
현수막을 들고 낑낑대며 지하철을 타고 홍대로 갔는데. 지하철에서 내려보니.
현수막은 1호선 어디쯤에 놓고 왔더라.
현수막을 찾으러 역무원 아저씨들께도 연락드려보고, 인천까지 1호선을 타고 가봤지만.
왠지모를 고급스러운 박스포장 때문이었는지. 누군가 들고 내려 되찾을 수 없었다.
현수막 들고간 사람. 배고플 때 딱 하나 남은 초밥먹으려다, 흙 바닥에 떨궈버려라.
반지 - 보통 나는 반지를 잃어버리면 신속하게 포기하지만.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모아 장만했던.
스물 몇살 당시 생활 수준을 한참 웃도는 커플링을. 도서관에 두고 책만 챙겨 돌아왔을 때에는.
쉽게 그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시 만나던 친구에게 절대 이 사실을 말 할 수 없다며.
도서관 바닥을 헤집고 다녔고, 아마 그 때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찾아주셨었나. 어쨌었나.
비싼 그림 - 돈 주고 산 그림을 집에 들고 오는 길은 정말 험난하다. 더군다나.
그 그림을 유럽에서 사서 한국으로 들고 들어오는 것이라면 더더욱 고난이 업그레이드된다.
일단, 돈주고 산 그림을 담아주는 화통의 사이즈라는 것은 아주 불길하게 생겨먹었다.
한손에 들거나 가방에 꽂기에는 턱없이 크며, 그렇다고 캐리어 가방같이 짐다운 존재감은 없다.
어깨 끈이 없어서 맬 수도 없으며, 그저 한아름 한쪽 팔로 오롯하게 안고다녀야 하는 크기이다.
비싼 그림 - 이 그림의 시작으로 말하지면, 빠리에서 친구와 친구의 친구들과 퐁피두를 들러.
뭔가 모를 현대 미술적인 감성이 막 목구멍 밑까지 차올라 찰랑거리던 그 쯔음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어떤 그림을 마주한 그 시점에서 시작된다.
뭐 딱히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기에는 그림이 좀 싼티가 나지만. 그래도 한국 돈 10만원 정도.
영화관에서 모두가 울적한 표정을 짓고있는데, 정가운데 앉은 주인공이 3D 종이 안경을 쓰고.
팝콘을 먹으며. 신나있는 표정을 짓고있는 그림. 당시 나를 비롯해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울적하고 침울한 얼굴로 세상을 살던 시기인지라. 저 안경 쓰고 세상을 보면. 좀 신나려나.
하는 기분에 그림을 덜컥 샀다는 말이다.
(그 안경은. 한쪽은 파란색. 한쪽은 빨간색. 어릴적 공포특급 첫장에 끼워져 있던 종이 3D 안경이다.)
그 그림을 사서 화통에 넣고. 꾸역꾸역. 친구의 친구네 집에 가져가고. 밤새도록 술을 먹고.
그리고 그 집에서 잠깐자고. 공항에 가져오는동안. 나를 잘 아는 내 친구는. 배웅을 해주며.
넌 분명 그림을 잃어버릴테니 내가 대신 들어주마. 하고 그림을 공항까지 운반해 주었더랬다.
비싼 그림 - 딱 여기서 부터다. 우선, 공항 도착하고 화장실에 다녀 온 후, 수속을 준비하고 있는데.
화장실 앞에 무슨일이 났는지. 공항 보안요원과 직원이 모여 분주하다. 나도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니.
내 화통을 들고. 폭발물이 아닌지 감식을 하고 있더랬지.
놀란 마음에 당장 말을 걸고, 그게 폭탄이 아니라 내 화통이다. 이래저래 설명을 하고 화통을 받아 와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밥을 먹고. 화통을 잘 챙겨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검색대를 지나 옷과 가방을 정리하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검색대 앞에 화통을 내버려두고.
또 비행기 게이트까지 갔더랬다. 보딩 시간에 임박해, 다시 검색대까지 뛰어가 겨우겨우 화통을 찾아오곤.
비행기 선반에 올려놓으며. 내릴때 잘 챙겨야지 다짐을 하고. 한국에 돌아왔었다. 그리곤 뭐, 한국에 와서.
결국, 세관신고 하는 곳 근처에서 놓고 그냥 들어왔었던가. 어쨌던가. 자세한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다행히, 인천공항의 분실물 센터에서 몇주 뒤 찾을 수 있었다.
그 밖에 - 어렸을 땐, 나는 학교에 입고간 가디건도 잃어버리고 돌아왔고.
(사실 지난달 광교 고깃집에서 데님 셔츠를 잃어버렸고, 지난 봄 출근길 녹색 셔츠를 잃어버렸다.)
스무살 무렵에는 홍콩 쇼핑몰에서 사촌동생 디카도 잃어버렸다 겨우 찾았고.
파리에서는 친구네 알바 가게 사장님 집에 핸드폰도 두고 왔었다.
우산은. 뭐. 말할것도 없지 뭐.
#.
잃어버리는 것 만큼.
잊어버리는 것도 많은데.
잃어버린건 잘 찾아왔는데.
잊어버린 것들은 잘 못 찾겠네.
눈누난나. 눈누난나.